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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와창건
달마산 미황사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摩山, 489m) 자락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위도상 우리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달마산의 끝자락이 땅끝으로 이어진다. 달마산은 백두대간의 맥이 마지막으로 솟아올라 이루어진 두륜산의 끝자락에 이어진 산으로 이곳의 지맥이 바다를 통해 한라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황사는 병풍같이 펼쳐진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석양 무렵의 낙조의 모습 등 산경을 배경으로 한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달마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긴 공룡의 등을 연상시키기는 산등성이의 온갖 기암괴석으로 인해 미황사를 뒤로한 산이 수십폭의 병풍을 펼치고 있는 듯 그 자연의 모습이 수려하다.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1692년(숙종18)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寺蹟碑)가 있다. 미황사의 부도전 옆에 있는 이 사적비는 창건시기와 창건연기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749년(신라경덕왕8)에 의조화상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미황사는 고려시대 지원년간(旨元年間)(1264~1294)에 남송(南宋)의 달관(達官) · 군자(君子)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며 부흥기를 맞았으며 조선전기에도 그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미황사의 조선시대 연혁은 1754년(영조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30)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 1601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만선(晩善)스님이 담당했다. 그 뒤 1658년(효종9)에서 1660년(현종1) 까지 두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성간(省侃) · 수신(脩信)스님이 담당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1751년(영조27)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내용은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1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왔고 대흥사와 마을에서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다. 1754년(영조30)에 여고(女古)가 4번째 중창을 하였으며 당시 대웅전의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다. 그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나한전(응진당)은 1761년(건륭16년)3월 26일에 대웅전은 같은 해 4월 11일에 각각 상양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로 보아 대웅전과 응진당은 18C에 건립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유일(蓮潭 有一)스님이 이곳에 머무르며 활발한 활동을 폈다. 스님은 특히 절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연담 스님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절에서 1799년(정조23)에 펴냈으며 스님의 입적 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스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1858년(철종9) 에는 영허의현(靈虛義玄)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며 이같은 내용은 초의선사가 지은『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응진당, 그리고 명부전, 요사체 등이 남아 있으나 옛날에는 통교사를 비롯 도솔암, 문수암, 보현암, 남암 등 12암자를 비롯하여 전각이 20여동이나 있었던 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미황사에는 현재 미황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부도가 28기, 탑비가 6기 경내에 있어 조선후기에 활발한 전법도장(傳法道場)이었으며 사격(寺格)이나 사세(寺勢)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보여준다. 미황사는 이러한 융성을 거듭하다 이 고장 북평면 출신 주지인 혼허(渾墟)가 절의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 당하여 젊은 승려들이 몰살당한 후 군고단 준비에 진 빛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청산도 사람들은 미황사 스님들이 빠져 죽은 그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궁고 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미황사 스님들의 12채 군고(진법군고)는 송지면 산정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어 오고있고, 진법군고의 깃발에는 바다거북이 등에 올라탄 삿갓 쓴 스님이 그려져 있다.

아이콘 웅진당
웅진당
보물 제183호인 응진당은 안쪽 벽면에 그림으로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아이콘 미황사 창건설화
미황사사적비
<미황사 사적비-미황사의 창건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자연석 기단위에 세워 특이하다>

미황사의 창건시기를 적은 미황사사적비에는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재미있는 연기설화가 전한다. 이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홀연히 한 석선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 송지면 갈두리 땅끝)에 와 닿았다 한다. 그런데 그 배 안에서는 하늘의 음악과 범패소리가 들려나와 한 어부가 이를 살피려 하자 이때마다 번번히 배가 멀어져갔다.

마침 이곳 달마산에서 수도를 하던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 · 장선(張善) 두 사미와 더불어 촌주 우감, 향도 일백인과 함께 가서 목욕재계하고 정성컷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곳에는 주조한 금인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배 안에는 금자(金字)화엄경(華嚴經)80묶음, 법화경(法華經)7묶음, 비로자나, 문수보혈 40성중(聖衆), 16나한(羅漢), 탱화 등이 있고 금환과 혹석이 각 한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을 싣고 해안에 내려놓아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혹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검은 소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달마산 미황사 전경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 여러 나라를 편력(編歷)하면서 경상(經像)모실 곳을 구하였는데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하여라’ 하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지쳐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미(美)하고 크게 울며 죽어 버렸다.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 사찰을 창건한 것이 통교사(通敎寺)요, 마지막으로 누워 죽은 골짜기에 사찰을 지어
성경(聖經)과 신상(神像)을 봉안하고 미황사라 했다. 이 때 미(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하고 황(黃)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해 미황이라 했다 한다.

이러한 창건설화는 보편적인 불교의 북방 전래설과는 달리 바다를 통한 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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